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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이야기

시속 500km의 벽이 아직 깨지지 않은 이유 | 초고속 하이퍼카의 과학

부가티 시론 슈퍼 스포츠 300+, 490.4km/h

 

SSC 투아타라, 474.7km/h

 

헤네시 베놈 F5, 437km/h

 

2005년, 시속 400km의 벽은 부가티 베이론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날, 아직까지 시속 500km의 벽을 깨뜨릴 자동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0년의 시간은 긴 시간입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서 기술의 발전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빨라졌구요. 그런데도 왜 아직 2005년 때보다 100km/h 더 빠른 자동차를 만들지 못하는 걸까요?

 

1. 부족한 출력?

 

엔진 출력이 500km/h에 도달하기에 부족해서일까요? 속도가 높아질수록 가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출력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예를 들어, 200마력으로 약 250km/h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면, 그 자동차가 500km/h으로  달리기 위해선 기존보다 8배 많은 1600마력이 필요해요. 

 

많은 하이퍼카 제조사들은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엔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위 사진의 엔진은 부가티 시론에 들어가는, 배기량 8리터, 실린더 16개에 터보가 4개나 달린 '토르' 엔진으로 1600마력을 내구요. 

 

 

사진의 엔진은 프로토타입으로 배기량이 7.6L이고, 양산품은 6.6L로 크기가 줄었어요

헤네시는 베놈 F5에 '퓨리'라는 별명을 가진 엔진을 넣었습니다. 6.6L V8 트윈터보 엔진으로 무려 1842마력을 내어, 내연기관엔진을 사용하는 양산차 중 가장 높은 마력을 내는데요. 1800마력대가 어느 정도냐면, 현세대 주력전차가 대략 1200-1500마력의 엔진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탱크보다 300마력이나 높은 출력을 내는 엔진이 들어가는 거예요.

 

 

미국의 주력전차 M1 에이브럼스가 1500마력을 냅니다. 물론 베놈 F5의 엔진이 60톤짜리 탱크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2. 버티지 못하는 타이어?

 

말도 안 되게 높은 출력을 보면 엔진이 발목을 잡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엔진의 힘을 도로로 전달해주는 타이어는 어떨까요? 아무리 강한 출력을 내더라도, 그 출력을 온전히 타이어로 보낼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초고속으로 주행하다가 타이어가 미끄러지거나 터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네요. 

 

문제는 초고속으로 달리면 타이어가 말 그대로 폭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시속 400km가 넘는 주행에서 5-7톤의 부하가 타이어에 걸립니다. 일반적인 타이어에 이 정도 부하가 걸리면 형태가 변형되면서 결국 터질 거예요. 이 타이어 문제 때문에 한동안 '아무리 엔진 출력이 높아져도 결국 타이어의 한계 때문에 최고 속도 기록 경신은 어렵다'는 의견이 자동차 업계에서 돌았어요.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PAX는 오직 베이론 슈퍼 스포츠를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부가티 베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한 타이어를 사용했습니다. 부가티 베이론 슈퍼 스포츠에는 해당 차종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타이어가 사용되는데, 한 세트에 42000 달러, 대략 6천만 원의 살벌한 가격표를 달고 있는데요.

 

 

 

베이론의 후속작, 시론에서 부가티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더럽게 비싼 특수 제작 타이어를 사용하는 대신, 양산형 타이어를 탄소 섬유로 강화해서 사용한 것인데요. 이렇게 타이어 내부에 탄소 섬유로 틀을 잡아 타이어가 변형되는 것을 방지해, 약 500km/h의 속도까지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3. 돌파할 수 없는 공기 저항?

 

그럼 타이어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봐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남은 건 공기 역학입니다. 지난 20년간 가장 많이 발전한 분야이기도 하고, 시속 500km의 돌파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시속 500km에 도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공기 저항입니다.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항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거든요. 

 

시론 슈퍼 스포츠 300+은 일반 시론보다 리어가 25cm가 더 깁니다

 

많은 제조사들이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쓰는 방법은 '꼬리 늘리기'입니다. 일례로 부가티 시론 슈퍼스포츠 300+은 일반 시론보다 꼬리가 길게 설계되었는데요. 이는 꼬리 와류 현상을 줄이기 위함입니다.

 

 

 

달리는 자동차는 공기를 '밀어내고' 지나가죠. 이 때문에 자동차의 뒷부분에는 기압이 낮은, '진공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공기는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이동하니, 이 진공 공간은 주변의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갖게 됩니다. 이에 주변 공기 흐름이 끌어당기는 힘에 휩쓸려 와류가 발생한다 하여 꼬리 와류 현상이라고 부르는데요.

 

문제는 이 끌어당기는 힘이 자동차도 끌어당긴다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뒤에서 당기는 힘은 앞으로 나아가는 자동차를 방해하겠죠. 이 꼬리 와류 현상을 줄이면 저항이 줄어드니 연비도 개선할 수 있고, 더 높은 최고 속도에 도달할 수 있어요.

 

 

 

시론 슈퍼스포츠와 같이 꼬리를 늘려 자동차의 뒤로 흐르는 공기 흐름을 매끄럽게 만들면 꼬리 와류 현상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맥라렌 스피드테일의 긴 꼬리를 가진 것도, 벤츠의 EQXX가 고속에서 자동으로 길어지는 꼬리를 가진 것도 모두 같은 이유 때문이에요. 

 

 

스피드테일도 최고 속도를 위해 아주 긴 꼬리를 갖고 있구요
제스코 앱솔루트가 일반 제스코보다 긴 꼬리를 가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전기 컨셉카인 EQXX는 주행 거리를 극한으로 늘리기 위해 고속에서 리어를 길게 늘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4. 도로의 문제?

 

위에서 자동차 관련된 문제들을 많이 언급했지만, 사실 오늘날의 가장 빠른 하이퍼카들은 위에 나온 문제들을 대부분 해결했습니다. 시뮬레이션에서는 시속 500km를 충분히 돌파할 수 있는 자동차들이 나왔거든요. 하지만 이 속도를 현실에서는 낼 수 없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있는데요.

 

 

바로 도로 때문입니다. 좀 김 빠지는 결말이긴 한데, 시속 500km까지 가속할 수 있을 정도로 길고, 직선에, 평평하고, 포장 상태가 좋은 도로가 없어 시속 500km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기록 측정을 위한 테스트 트랙을 쓸 순 없을까요? Ehra-Lessien에 딱 적합한 테스트 트랙이 있습니다. 총 96km 길이에, 8.7km의 완전히 평평한 직선 구간도 있거든요. 문제라면 해당 트랙은 폭스바겐이 소유하고 있어, 폭스바겐 계열사가 아니라면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이퍼카 전쟁에 참전한 제조사 중 폭스바겐 산하의 제조사는 딱 하나, 부가티뿐이네요.

 

 

 

그렇다면 다른 제조사들은 어떻게 기록을 측정할까요? 먼저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을 빌려서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미국의 네바다 사막을 지나는 고속도로는 엄청나게 긴 직선 구간으로 유명하죠. 문제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도로가 평평한 구간을 찾기 어렵습니다.

 

2017년 최고 속도 기록을 경신한 코닉세그 아제라 RS도 네바다 고속도로에서 기록을 측정했습니다. 약 17km 구간을 빌려서 기록 측정을 했는데, 문제는 도로에 경사가 있어 내리막에서는 최고 속도가 457km/h가 나왔지만, 오르막에서는 436km/h가 나왔습니다. 코닉세그는 두 속도의 평균을 내어 기록을 등록했지만, 평평한 도로에서의 정확한 최고 속도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론 활주로가 있습니다. 활주로는 도로가 완전히 평평하니, 경사로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길이가 문제입니다.

 

올해 5월 14일, SSC 투아타라는 플로리다의 우주선 활주로에서 기록 측정을 시도했습니다. 약 3.7km의 구간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시속 474km의 속도에서 활주로가 끝나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부가티가 시속 490km를 낸 Ehra-Lessien의 8.7km 직선 구간에 반도 안 되는 거리로 비슷한 속도를 낸 만큼, 가속이 훨씬 빨랐기 때문에 도로가 좀 더 길었다면 SSC 투아타라가 부가티를 이기고 시속 500km를 돌파했을 거라는 의견이 많았어요. 

 

결국, 기록 측정에 좋은 도로가 만들어지면 시속 500km의 벽은 깨질 겁니다. 다만 그만한 도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최고 기록 경신에 대한 수요가 있느냐는 생각 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내연 기관의 시대가 끝나가고 전기차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지금, 부가티마저도 최고 기록 경신에 손을 뗀다고 밝혔는데요. 과연 전기차의 시대에 소수의 하이퍼카 제조사들끼리 경쟁을 이어갈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사용된 사진 자료

SSC Tuatara by Caranddriver

Hennessey Venom F5 by Topgear

Bugatti Chiron Engine 'Thor' by Motor1

Venom F5 Engine 'Fury' by RoadandTrack

M1 Abrams by unknown author

Hennessey Venom F5 Wheel by Forgeline

Chiron Super Sports Tire by Car Insider

Car wind tunnel by Business Insider

Bugatti Chiron by Bugatti

Bugatti Chiron Super Sports 300+ by Bugatti 

Bugatti Chiro aero design by Motor1

Mclaren Speedtail by Topgear

EQXX Wind tunnel by Drivingyourdream

Koenigsegg Jesko Absolut by Topgear

Ehra-Lessien Track by Mundo Motor

Nevada Highway by Gina Corena

Shuttle Landing Facility by NASA/Kim Shiflett